정책은 AI를 향하지만, 산업 승부는 장비·기계 기술에서 갈린다
AI 이후 준비하는 제조업, 한국이 마주한 구조적 한계와 선택지
제조업 현장에서 인공지능(AI)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공정 자동화, 품질 검사, 예지보전, 자율로봇 운영까지 AI는 제조 경쟁력의 핵심 도구로 자리 잡았다. 글로벌 제조 AI 시장은 2025년 약 342억 달러에서 2030년 1,55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며, 연평균 성장률은 35%를 상회한다. 주요 제조국들은 예외 없이 AI를 제조업 혁신의 핵심 축으로 삼고 정책과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산업계와 정책 현장에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AI 경쟁이 일정 수준에 도달한 이후, 제조업의 진짜 승부처는 어디인가라는 물음이다. 한국기계연구원이 발간한 기계기술정책 보고서는 이에 대해 분명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AI 경쟁의 다음 국면에서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요소는 AI 그 자체가 아니라, AI가 구현되는 ‘기계와 장비의 본질적 성능’이라는 진단이다.
AI가 주도한 제조 혁신, 그러나 물리적 한계는 여전히 존재
제조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공정의 최적해를 도출하고, 불량과 비효율을 사전에 예측하는 데 강점을 가진다. 실제로 글로벌 선도 기업들은 AI 기반 예측정비와 디지털 트윈을 통해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납기를 단축하며, 신규 고숙련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AI는 제조 현장을 ‘사후 대응형’에서 ‘예측·선제형’ 운영 구조로 전환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기계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기계기술정책 보고서는 AI의 역할과 한계를 명확히 구분한다. AI는 기계의 성능을 극대화할 수는 있지만, 기계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는 점이다. 공작기계의 강성, 열 안정성, 베어링 정밀도가 충분하지 않으면 AI 기반 보정에도 품질 향상에는 한계가 따른다. 로봇 역시 제어 소프트웨어가 고도화되더라도 모터 출력, 센서 해상도, 제어 주기의 제약을 넘어서는 정밀성과 속도를 구현하기는 어렵다. 결국 제조 경쟁력은 ‘하드웨어 성능 × 소프트웨어 지능’이라는 곱셈 구조로 결정되며, 어느 한쪽만으로는 지속적인 우위를 확보하기 어렵다.
주요국 정책 경쟁, AI 전략은 달라도 기계 기술은 공통분모
이 같은 인식은 주요국의 정책과 기업 전략에서도 확인된다. 미국은 ‘AI for Resilient Manufacturing’을 통해 제조 강건성을 높이는 동시에, 엔비디아·GE·팔란티어 등 글로벌 기업을 중심으로 AI·클라우드·로봇을 통합한 자율제조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유럽은 ‘AI 팩토리’ 정책과 ‘Manufacturing-X’를 통해 공장 내부를 넘어 공급망 전반의 데이터 연결과 자율 운영을 목표로 삼고 있다.
독일은 Industry 4.0의 심화 단계로 Manufacturing-X를 추진하며, 데이터 중심 스마트 팩토리와 자율 공장을 핵심 과제로 설정했다. 일본은 팬룩(Fanuc), 오므론(Omron) 등 전통적인 기계·로봇 기업을 중심으로 센싱·제어·AI를 기계 내부에 깊숙이 내재화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중국 역시 정부 주도의 대규모 투자와 표준화를 통해 AI·로봇·디지털 트윈을 결합한 스마트팩토리를 빠르게 확산 중이다.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AI 경쟁력의 지속 가능성은 결국 기계 기술의 내재화 여부에 달려 있다는 점은 공통된 인식이다.
한국 제조업의 기회와 한계…AI는 빠르지만 기계는 취약하다
한국은 제조 AI 확산 속도 측면에서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에너지 등 주력 산업을 중심으로 AI 기반 공정 혁신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정부 역시 ‘AI 팩토리’를 중심으로 제조 현장의 자율화·지능화를 정책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까지 AI 도입을 확산시키겠다는 정책 방향은 국내 제조 생태계 전반의 경쟁력 제고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보고서는 구조적 한계를 동시에 지적한다. 반도체 제조장비, 산업용 로봇의 핵심 부품과 원천 기술 상당 부분을 여전히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상태에서는 AI 경쟁력이 단기 성과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가 현실화될 경우, 기계 기술 자립도가 낮은 제조업은 AI를 활용할 기회 자체를 잃을 수 있다. AI 활용이 보편화되고 알고리즘 경쟁이 상향 평준화될수록, 차별화의 기준은 다시 기계와 장비의 물리적 성능으로 이동하게 된다.
기업 전략의 변화…‘AI for Machine’에서 ‘Machine for AI’로
보고서는 향후 제조 혁신의 핵심 키워드로 ‘AI for Machine’과 ‘Machine for AI’를 제시한다. AI를 활용해 기계를 설계·고도화하는 동시에, AI가 최대 성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계의 물리적 한계를 확장하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AI 제어, 디지털 트윈, 자율로봇 운영체계 등 소프트웨어 경쟁력 강화와 함께, 정밀 제어 부품, 고강성 구조물, 센서·액추에이터 등 기계 기반 기술에 대한 중장기 R&D 투자가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산업 데이터 표준화와 보안 체계 구축, 민관 협력 기반의 제조 데이터 플랫폼 조성, 중소·중견 장비 기업을 위한 공용 테스트베드 확대 역시 중요한 과제로 제시된다. 이는 단순한 기술 개발을 넘어, AI 시대에 맞는 제조 생태계를 새롭게 설계하는 과정에 가깝다.
AI는 두뇌, 기계는 몸…제조 경쟁력의 본질을 다시 묻다
제조 AI 경쟁은 이미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진짜 승부는 그 이후에 있다. AI가 두뇌라면, 기계 기술은 심장과 근육, 골격에 해당한다. 몸이 약하면 두뇌의 판단도 현실이 될 수 없다. 한국 제조업이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AI 투자만큼이나 기계 기술의 내재화와 원천 경쟁력 확보에 정책·산업·기업 전략을 집중해야 할 시점이다.
헬로티 임근난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