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전지 산업을 둘러싼 수많은 화두 중 현재 가장 뜨겁게 논란이 되고 있는 키워드는 바로 중국시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세를 늘리고 있는 인산철(LFP) 배터리일 것이다. 시장조사기관에 따르면 LFP 배터리는 중국 배터리 업체들이 주력하고 있는 배터리 종류로 연간 생산되는 순수전기차에 탑재된 비율이 2018년 8%에서 지난해 40%까지 5배 이상 늘었다.
점유율이 이토록 급격히 확대된 데에는 물론 중국 정부의 내수 시장 일감 몰아주기 전략이 큰 영향을 끼쳤지만, 주요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LFP 배터리를 자사 전기차에 탑재하겠다고 하나둘 발표하고 나서고 있는 만큼, 글로벌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마냥 과소평가할 수만은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KG모빌리티 등 국내 완성차 업체들도 가격 경쟁력을 이유로 들며 저가의 소형 전기차를 위주로 중국산 LFP 배터리를 탑재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만큼, 국내 이차전지 업계에도 영향이 있을 전망이다.
LFP 배터리는 성능, 안전성 등 측면에서 국내 배터리 회사들이 주력해온 삼원계(NCM) 배터리와 비교되며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과연 LFP 배터리가 계속해서 점유율을 확대할 수 있을지, 국내 배터리 업계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상황. 이에 본지는 LFP 배터리 특집 기획 시리즈 연재를 통해 현재 LFP 배터리를 둘러싼 여러가지 쟁점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명확한 에너지밀도의 한계
주행거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에너지밀도는 ‘단위 무게 당 저장된 에너지의 양’으로 이차전지의 성능을 평가할 때 쓰이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다. 차량의 무게 등 다른 조건들이 전부 같다는 가정 하에 배터리의 에너지밀도가 높을수록 1회 충전으로 더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
LFP 배터리의 에너지밀도가 NCM 배터리보다 낮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명백한 사실이다. 일반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NCM811(니켈8, 코발트1, 망간1)을 기준으로 NCM 배터리의 에너지밀도가 300Wh/kg에 이르는 데 반해 LFP 배터리의 평균적인 에너지밀도는 160Wh/kg 수준이다. LFP 배터리의 에너지밀도가 NCM 배터리의 절반을 살짝 상회하는 수준인 것이다.
에너지밀도만을 고려한다면 LFP 배터리는 설 자리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특정 배터리가 서 전기차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일 때에는 에너지밀도와 같은 성능 외에 다른 기준이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바로 가격 경쟁력이다.
실제로 글로벌 시장의 전기차 판매 성장률이 주춤하면서 업계에서는 고성능 배터리가 탑재된 하이엔드 전기차가 아니라, 전기차 가격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배터리에서 원가를 절감한 저가의 전기차 모델을 출시해 소비자들의 전기차 구입 진입 문턱을 낮추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테슬라는 지난 8월 한국 시장에 중국산 LFP 배터리를 탑재한 모델Y RWD를 출시했다. 현재 모델Y 외에도 기아의 레이 EV, KG모빌리티의 토레스 EV, 볼보의 EX30 등 한국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다양한 전기차 모델이 LFP 배터리를 적용하고 있다. 소형 경차와 저가형 전기차를 중심으로 LFP 배터리 채택이 늘면서 최근 현대자동차도 올해 하반기 출시 예정인 캐스퍼의 전기차 모델 ‘캐스퍼 일렉트릭’에 LFP 배터리를 탑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해외 시장에서도 완성차 업체들은 LFP 배터리라는 카드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일례로 GM은 쉐보레 간판 전기차 ‘볼트 EV’를 2025년 복귀시킨다고 발표했다. 당초 GM은 2022년 초 볼트 EV 2세대를 출시했으나 수익성을 이유로 생산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었다. 그러나 시장에 가격 경쟁 바람이 불면서 해당 계획을 철회했다. GM은 다시 생산하게 될 볼트 EV에 LFP 배터리를 탑재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전기차 보급 단계에서 전기차의 가격이 소비자들의 전기차 구매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고, 완성차 업체들이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LFP 배터리를 채택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고 향후 전기차 구매 보조금 축소 계획에 대응하려 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전기차 모델 선택지의 다양화 역시 전기차 보급의 주요 키포인트 중 하나로 꼽힌다.
이에 국내 배터리 기업들 역시 LFP 배터리 개발에 나섰다. 노선 변경이라기 보다는 포트폴리오 다양화의 성격이 강하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3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전기차용 저가형 LFP 배터리를 2026년부터 생산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창실 LG에너지솔루션 최고재무책임자 부사장은 향후 회사가 저가형 전기차 배터리 시장 대응을 위한 제품 포트폴리오를 확대할 계획임을 밝혔다.
이 부사장은 "LFP 기반 제품을 적극 개발 중"이라며 "파우치가 가진 셀 무게, 공간 활용률 등의 강점을 결합하고 셀 구조 개선과 공정 혁신 등을 추진해 전기차용 LFP와 리튬망간인산철(LMFP) 기반 신규 제품을 생산할 것"이라면서 "해당 제품들을 2026년과 2027년에 연속해서 선보이는 것을 목표로 준비 중"이라고 언급했다. 이어 "LG에너지솔루션은 일시적 변동성에 연연하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사업 준비에 집중하려 한다"며 "북미 중심 성장 모멘텀을 계속 이어 나가되 시장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고, 스마트팩토리와 밸류체인 확보 등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SK온은 지난해 인터배터리 행사에서 전기차용 LFP 배터리 시제품을 공개하기도 했다. 관계자는 “보급형 제품인 LFP 배터리 개발을 완료하고 고객과 공급 관련 논의를 진행 중”이라며, “기존 LFP 배터리보다 에너지 밀도와 급속 충전, 저온 성능 등이 향상된 셀을 개발했다”고 설명했다.
삼성SDI도 최근 LFP 배터리 시장 진출을 공식화했다. 다만 삼성SDI가 언급한 LFP 배터리는 전기차용이 아니라 에너지저장장치(ESS)용이다. 삼성SDI는 지난해 10월 콘퍼런스콜을 통해 “2026년 양산을 목표로 ESS용 LFP 배터리 소재를 개발하고 있으며, 라인 구축 계획도 검토 중”이라며, “경쟁사 대비 LFP 배터리 시장 진입 시기가 늦지만, 원가 경쟁력과 품질을 높여 시장에 연착륙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기차용 LFP 배터리 생산 계획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LFP 배터리 확대를 통해 가격 장벽을 낮추려는 완성차 업계의 흐름이 다소 분명해보임에 따라, 국내 배터리 산업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우리 기업들이 LFP 배터리에 뒤늦게 뛰어들고 있지만, 이미 오랫동안 LFP 배터리를 만들어온 중국 기업의 양산성을 따라잡기 힘들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시장에서 중국산 LFP 배터리를 탑재해 싸게 만든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중국 배터리 업체들의 영향력을 키워줘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배터리 업계에 악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는 문제 제기 역시 가볍게 볼 수 없다.
작년 하반기 국내 시장에 출시된 테슬라 모델Y는 LFP 배터리를 탑재해 기존 모델들보다 2000만 원 이상 가격을 낮춰 5700만 원 이하여야 한다는 보조금 지급 조건을 통과했다.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1~11월) 테슬라의 국내 전기차 판매량은 1만 5439대로, BMW, 벤츠, 아우디에 이어 4위를 기록했는데, 모델Y 단일모델의 하반기 판매량만 1만 1059대로 전체 모델 중 84.8%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국내 시장의 전기차 성장세가 본격적으로 꺾이기 시작한 하반기부터 테슬라의 전기차 판매량은 오히려 크게 증가했다는 사실인데, 우리나라에서 판매되고 있는 모든 전기차 가운데 하반기에 1만 대 이상 판매한 모델은 테슬라 모델Y가 유일하다. 국내 시장에서의 전기차 판매량 감소는 테슬라를 제외한 다른 완성차 회사의 전기차 판매량이 크게 줄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각에서는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이 전기차 가격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중국산 LFP 배터리를 적극 채택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중국 배터리 업체들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면, LCD나 태양광 패널 산업 등의 전례를 따라 3원계 배터리에 주력해온 국내 기업이 중국 기업에 잠식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에너지밀도 측면에서 LFP 배터리의 한계가 비교적 명확하기 때문에 성능이 낮은 중저가의 전기차에 한정적으로 쓰일 수 있을 뿐 하이엔드 고급 전기차 등에는 여전히 3원계 배터리가 사용될 수밖에 없어 심각히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판단이다.
향후 전기차가 일반화되면 가격과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전기차 모델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완성차 시장에서 디젤, 가스, 경유 등 다양한 연료가 공존하듯 LFP 배터리와 기존의 3원계 배터리가 공존할 것이란 분석이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은 작년 말 기자간담회에서 “수년이 지나도 NCM과 LFP 두 가지 배터리는 공존할 것으로 본다”면서, “프리미엄 전기차에는 NCM 계열이 우수하고, 보급형 전기차에는 LFP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지만 중간 단계 시장을 누가 장악할지는 아직 모른다”라고 언급했다.
아울러 회사가 미국과 일본의 최대 완성업체인 GM과 토요타와 고객을 확보하고 있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우면서 “우리는 NCM 배터리 최고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LFP 배터리도 개발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과 차별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국내 업체들도 자체 LFP 배터리 개발을 포트폴리오의 다변화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고, 삼원계 및 차세대 배터리 개발 분야에서 국내 기업들이 압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만큼, LFP 배터리 사용 확대가 우리 기업들의 글로벌 사업에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하게 될지는 더 조심스럽게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헬로티 이동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