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의 패러다임이 ‘뭘 만들지’에서 ‘어떻게 결정할까’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무수한 설계 선택지 중에서 최적의 답을 찾아 현실로 구현하는과정은 이제 엔지니어 혼자의 직관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초복잡성의 영역에 진입한 것. 이러한 전환기에서 전 세계 설계자들의 시선은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으로 향했다.
지난 2월 1일(현지시간) 막을 올린 ‘다쏘시스템 3D익스피리언스 월드 2026(Dassault Systèmes 3DEXPERIENCE World 2026 이하 3DXW)’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다쏘시스템과 엔비디아(NVIDIA)의 만남이었다.
산업 소프트웨어의 제왕과 가속 컴퓨팅의 상징이 한 무대에 선 장면이 현실화됐다. 양사의 파트너십은 두 거대 기업의 결합을 넘어선 가치다. 설계의 프로세스 자체를 뿌리째 바꾸겠다는 선언이었다. 설계·검증·의사결정이 쉼 없이 반복되는 순환의 핵심으로 산업용 인공지능(AI)을 택한 것이다. 업계는 이에 대해 엔지니어링 프로세스의 ‘동적 실행 전환’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이번 다쏘시스템과 엔비디아의 협력 발표는 설계가 구동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선언으로 해석된다.
파스칼 달로즈(Pascal DALOZ) 다쏘시스템 최고경영책임자(CEO)가 “단순히 산업 현장에 AI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는 가용 자원, 기능, 검증 프로세스와 결합될 때 실질적인 가치를 창출하며, 그 토대에는 다쏘시스템이 축적해 온 산업 지식이 자리한다는 것이다.
달로즈 CEO가 제시한 세계관의 핵심은 ‘지식의 경제(Economy of Knowledge)’다. 그는 “20세기가 물리적 사물을 생산하고 사용하는 시대였다면, 현재는 지식과 노하우를 생산하고 그 지식이 다시 사물을 만들어내는 시대로 전환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 연장선에서 다쏘시스템의 솔루션이 상호작용하는 생태계인 ‘3D익스피리언스 유니버스(3DEXPERIENCE UNIVERSE)’를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애플리케이션이 아니라 지식의 공장”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식이 축적·확장되고 그 결과가 신뢰 가능한 형태로 보존되는 공간이 확보돼야 산업용 AI가 도구를 넘어선 인프라가 된다는 논리다.
그는 이 산업용 AI를 거대언어모델(LLM)이 아닌 ‘월드 모델(World Model)’로 정의했다. 그러면서 물리 법칙과 제약조건 속에서 제품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를 이해하는 지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젠슨 황(Jensen Huang) 엔비디아 CEO는 다쏘시스템의 이러한 철학을 ‘실제 일하는 방식’으로 구체화했다. 그는 “앞으로 거의 모든 작업 프로세스 안에 AI가 들어오게 될 것”이라며 인간과 AI 동반자가 설계 과정의 유기적인 일부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특히 그는 “이 AI는 사용자의 선호·습관·전문성을 기억하고 코드화하며, 그 지식은 철저히 개인에게 귀속된다”고 못 박았다. AI를 엔지니어의 실질적인 파트너로 안착시키기 위해, 성능보다는 ‘소유권과 보안 경계’를 최우선 협력 조건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덧붙였다.
이러한 시각은 AI 동반자와 에이전트가 가져올 변화를 예측케한다. 황 CEO는 “사진·음성·영상 등 비구조화된 정보를 AI를 통해 정밀한 3차원(3D) 구조화 데이터로 변환할 수 있다”면서 이해를 도왔다. 정보가 3D로 전환되는 순간 제어와 재사용이 가능한 자산이 되며, 설계자는 정보를 검색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AI 에이전트에게 과업을 분배하고 결과를 검증하는 전략적 관리자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이는 이번 협력이 업무의 분업 구조 자체를 겨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러한 변화가 인력을 감축하는 방향이 아니라, 도구 활용도를 폭증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황 CEO는 “설계 엔지니어의 수가 줄어들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며 “모든 설계자는 자신만의 AI 동반자 팀을 보유하게 되고, 이 팀원들은 모두 다쏘시스템의 도구를 사용하게 된다”고 전망했다. 이에 따라, 설계자 한 명이 동반자 팀의 관리자가 되는 구조에서는 소프트웨어의 사용량과 운영 모델 또한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의 실무적 사례는 항공기 인증 영역에서 더욱 구체화됐다. 달로즈 CEO는 미국 위치타 주립대학교(Wichita State University) 산하 국립항공연구소(NIAR)의 사례를 들어 “수만 개의 요구사항이 얽힌 항공기 인증 과정에 AI 동반자를 투입함으로써 규제 분석과 검합성 검증을 자동화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는 규제 대응이 사후 비용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설계 초기 단계부터 경쟁력으로 내재화되는 ‘규제 통합 설계(Compliance by Design)’의 실현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설계 단계부터 규제와 표준을 자동으로 지키도록 만드는 방식인 셈이다.
이날 양사의 월드 모델에 대한 논의 역시 물리 법칙과의 연결성으로 수렴됐다. 황 CEO는 “언어 모델이 문법과 어휘를 다룬다면, 월드 모델은 인과관계·관성·마찰·중력 등 물리 법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주장은 언어 학습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시뮬레이션과 물리 기반 데이터를 통해 AI에 현실 감각을 학습시켜야 한다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제조와 규제 요건은 설계 초기 단계로 전진 배치(Shift Left)돼 설계가 완료되는 순간, 모든 물리적·법적 요건을 충족하는 결과를 낳는다. 처음부터 틀리지 않는 설계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번 파트너십은 엔비디아의 가속 컴퓨팅이 다쏘시스템의 가상 환경 방법론 ‘버추얼 트윈(Virtual Twin)을 더 빠르게 구동하는 기반을 마련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설계의 주체가 작업자 단독에서, ’사람과 동반자 팀’으로 진화하는 것. 그리고 검증·규제가 핵심 경쟁력으로 이동하며, 모든 정보가 즉각적으로 3D 자산화되는 순환을 표준으로 수립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양사는 “속도는 혁신의 결과일 뿐, 진정한 변화는 설계 순환 구조의 근본적인 재구성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헬로티 최재규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