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단형 인큐베이팅으로 ‘창업→성장→투자’ 선순환 구축해야
창업혁신지구와 단계별 성장지원체계, 새로운 생태계 출발점
한국 산업의 성장 신화는 산업단지에서 시작됐다. 1970년대 포항제철과 구미전자, 1980년대 창원기계와 반월·시화 국가산단까지, 산업단지는 제조업 르네상스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엔진이 멈추고 있다. 한국산업단지공단 산단정책연구소의 최신 보고서 「산업단지 제조창업 기업의 현황 및 특성 분석과 시사점」은 이를 명확히 지적한다.
전국 1,341개 산업단지 중 515곳(38.4%)이 이미 ‘노후 단지’로 분류되며, 산업구조는 여전히 전통 주력산업 중심에 머물러 있다. 공장은 남았지만, 새로운 기업은 들어오지 않는다.
보고서는 이 위기의 원인을 “창업이 끊긴 생태계”에서 찾는다. 창업이야말로 산업단지를 되살릴 새로운 불씨이며, 특히 제조창업은 ‘산업단지의 활력 회복–지역균형 성장–산업구조 전환’의 세 축을 연결하는 핵심 열쇠라는 것이다.
제조창업, 숫자는 늘지만 산업단지를 떠난다
2022년 기준 국내 제조창업 기업은 27만 개로, 전체 창업기업(482.9만 개)의 5.6%를 차지한다. 매출액은 171조 원, 종사자는 90만 명으로, 도매·소매업 다음으로 높은 매출 기여도를 보였다.
그러나 산업단지 내에서의 존재감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 2021년 26.7%였던 산업단지 제조창업 기업 비중은 2022년 17.2%로 급감했다. 반면 일반상업지역 내 창업 비중은 61%로 확대됐다. 이는 제조창업의 공간 중심이 산업단지에서 외부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산업단지 입주비중이 1년 새 9.5%포인트 하락했다는 점은 산단이 더 이상 ‘창업의 첫 무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공간의 제약, 높은 임대료, 유연성 부족 등 구조적 요인이 창업기업의 이탈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수도권 쏠림 심화, 지방산단의 활력은 식어간다
2023년 기준 산업단지 내 제조창업 기업은 8,931개. 그중 7,190개, 즉 80.4%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경기(44.8%)·인천(25.8%)·서울(9.9%)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비수도권은 경북(4.8%)·경남(3.7%)·전북(2.8%) 수준에 머문다.
과거 제조업 중심지였던 창원과 구미의 변화는 상징적이다. 창원국가산단의 제조창업 비중은 2019년 89.6%에서 2023년 69.4%로, 구미산단은 같은 기간 95.7%에서 84.7%로 떨어졌다. 산업 기반은 유지되지만, 새로운 기업의 유입이 막힌 지역형 산업단지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결국 산업단지의 쇠퇴는 단순한 설비 노후화의 문제가 아니다. 창업이 멈춘 순간, 산업단지는 생명력을 잃는다. 보고서는 이를 “산단 내 혁신기업 부재가 구조적 활력 저하를 초래한다”고 진단했다.
창업의 중심이 ‘상업지’로 이동한 이유
산업단지 내 제조창업의 감소는 단순히 통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면에는 공간과 제도의 경직성이 자리하고 있다.
첫째, 산업단지의 창업공간은 대부분 소형 오피스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연구개발형 기업에게는 적절하지만, 장비와 재고를 보유해야 하는 제조창업에게는 턱없이 부족하다. 한 제조창업기업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 입주 공간은 연구소 용도로만 적합합니다. 인원이 늘고 생산설비가 필요해지자, 어쩔 수 없이 외부 공장을 임대해야 했습니다.”
둘째, 공간의 임차 구조가 고착화돼 있다. 2023년 기준 산단 내 제조창업 기업의 65%가 임차 형태로 입주했으며, 기계·철강 업종은 임차 비율이 70%를 넘는다. 업력이 길어질수록 자가 비율이 늘어나지만, 초기 창업기업은 자산 축적 이전에 공간 확보조차 어렵다.
셋째, 지원 체계가 수도권 중심으로 몰려 있다. R&D, 투자, 인재 네트워크가 수도권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비수도권 창업기업은 자금과 판로 모두에서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다. 결국 많은 제조창업이 상업지역이나 도심형 오피스로 이동하는 흐름을 만든 것이다.
산업단지, 다시 창업을 품어야 한다
산단정책연구소는 산업단지의 활력 회복을 위해 “창업기업 맞춤형 공간과 단계별 성장지원체계”를 동시에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공간 재설계 – ‘KICXUP 모델’로 탈바꿈
현재 정부는 휴·폐업 공장 리모델링 사업을 통해 전국 28개 산업단지를 창업거점센터로 전환 중이다. 구미, 군산, 남동 등 11개 단지는 이미 준공됐으며, 서울(29개실)과 광주(15개실)에는 KICXUP이 운영 중이다. 이 공간은 단순 임대가 아닌 모듈형·가변형 창업공간으로 구성된다. 창업 초기기업(20평 내외), 도약기기업(60평 내외) 등 성장단계별 규모를 고려하고, 공용 회의실·전시공간·운동시설·탕비실 등 복합 편의 인프라를 함께 제공한다. 또한 대학·지자체의 창업보육센터보다 입주요건이 완화돼 있으며, 비제조업뿐 아니라 전통 제조업 기반 스타트업도 입주할 수 있는 개방형 구조를 갖췄다. 이는 ‘산단형 창업 인큐베이팅’의 새로운 전환점을 보여준다.
◇ 단계별 지원체계 – ‘창업에서 스케일업으로’
산업단지 내 창업기업의 70% 이상이 3~7년차 도약기 기업이다. 이들은 R&D는 끝냈지만, 양산 자금이나 판로 확보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한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제품을 개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양산 자금이 부족해 대규모 수주 계약을 포기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단계별 성장지원 프로그램이다. 창업 초기에는 교육·컨설팅·시제품 제작·소액지원 등 기반 조성이, 도약기에는 자금조달·공동 마케팅·대기업 연계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즉, 산업단지의 역할은 단순 공간 공급을 넘어 창업–성장–투자–회수로 이어지는 “산단형 스케일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있다.
수도권을 넘어, 비수도권에 ‘창업혁신지구’를
보고서는 향후 정책의 초점을 “균형 잡힌 창업 인프라”로 맞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핵심이 바로 ‘창업혁신지구(가칭)’다. 비수도권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창업혁신지구를 지정해 산학융합지구와 연계하고, 입주 규제 완화·세제 혜택·창업전용시설 확충 등 규제특례를 적용한다는 구상이다.
또한 산업단지공단, 지자체, 대학, 액셀러레이터가 참여하는 ‘산단 창업지원협의체’를 통해 창업-성장-재투자 전 과정을 유기적으로 지원하는 협력 모델을 만든다. 이는 산업단지가 단순한 공장 밀집지가 아니라, ‘지역 혁신창업의 거점’으로 변모할 수 있는 실질적 제도 틀이다.
산업단지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지금의 산업단지는 낡은 설비만이 아니라 낡은 시스템에 갇혀 있다. 과거 제조 대기업 중심의 산업단지에서 이제는 기술창업, 중소 제조벤처, 스타트업이 주역이 되는 ‘신(新) 제조창업형 산단’으로 전환해야 한다.
보고서의 결론은 명확하다. “산업단지 내에서 창업기업의 육성–안착–재투자–협력이 선순환되는 창업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산업단지는 더 이상 공장지대가 아니라 기술과 창의가 교류하는 산업혁신 실험실(Lab)이 되어야 한다. 그 출발점은 바로 ‘창업’이다. 창업이 산업단지를 떠났다면, 이제 산업단지가 창업을 다시 품어야 한다.
헬로티 임근난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