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기술을 둘러싼 미중 간 패권 경쟁이 다시 한 번 전선을 넓히고 있다. 미국 정부가 최근 엔비디아의 AI 반도체 H20 칩에 대해 대중국 수출 규제를 무기한 확대 적용하기로 하면서, 기술이 외교 무기이자 경제 제재 수단으로 사용되는 현실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번 규제는 표면적으로는 국가 안보를 위한 조치지만, 그 이면에는 산업 경쟁력과 글로벌 시장 지형을 뒤흔드는 복합적 의도가 깔려 있다. 규제의 최전선에 선 엔비디아, 이를 정면 돌파하려는 중국,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영향을 받는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의 이해관계가 복잡해지고 있다.
H20까지 막은 美 수출 규제
지난 4월, 미국 상무부는 AI 학습에 활용되는 고성능 GPU인 엔비디아 H20 칩의 중국 수출을 원칙적으로 제한하는 새 규제를 통보했다. 이는 2022년 바이든 행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반도체 통제 정책의 연장선으로, 당초 A100과 H100 등 첨단 GPU에 한정됐던 제한을 H20까지 확대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이번 규제 조치에 대해 “H20 칩이 중국 내 슈퍼컴퓨팅 및 AI 기반 군사 응용에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는 단순한 기술 이전이 아닌, 중국의 군사기술 고도화를 억제하겠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조치다. H20 칩은 연산 속도는 H100 대비 낮지만, 고대역폭 메모리(HBM3)와 고속 인터커넥트를 갖춘 ‘중국 맞춤형’ 제품이다. 특히 딥시크의 대형 언어모델 DeepSeek-V2가 실제로 H20 칩으로 학습된 것으로 알려지며, 미국의 규제 근거에 더욱 무게를 실었다. 이에 H20은 규제 회피를 위한 우회 제품으로 간주되며, 규제 대상에 포함됐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주체는 단연 엔비디아다. H20은 엔비디아가 미국 정부의 초기 규제를 피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설계한 제품으로, 2023년 말부터 중국 시장에 공급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엔비디아는 2024년 회계연도 기준 전체 매출 609억 달러 중 약 95억 달러(15.6%)를 중국 시장에서 거둔 것으로 보고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젠슨 황 CEO가 수출 규제 직후 베이징을 방문한 것은 단순한 고객 대응을 넘어, 기술기업 CEO가 외교의 전면에 나서는 장면이었다. 그는 중국 정부 고위급과 연이어 회동하며 “중국 시장은 엔비디아에 매우 중요하다”며 협력 의지를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규제를 재강화하는 와중에도 CEO가 직접 중국 고객사인 딥시크, 텐센트, 바이두 등을 만났다는 점은 엔비디아의 위기감을 보여주는 신호다. 문제는 H20 이후에도 규제를 피할 새로운 칩을 설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엔비디아는 현재 H20 후속으로 성능을 일부 낮춘 H20 Lite, 또는 블랙웰 기반의 중국 전용 칩 개발을 내부적으로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전략 ‘기술 통제인가, 헤게모니인가’
AI 반도체는 단순한 상업적 제품이 아니다. 이는 AI 모델 훈련·추론, 고성능 클라우드 컴퓨팅 인프라의 핵심 부품으로, 국가 간 기술 경쟁력의 핵심축으로 부상했다. 엔비디아가 시장 점유율 80% 이상을 점한 가운데, 중국이 자국산 칩으로는 아직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미국은 지금이 기술 차단의 적기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번 규제로 미국은 중국의 AI 산업 발전 속도를 늦추는 동시에, 자국 내 경쟁 기업의 미국 및 비중국권 시장 진입 기회를 확보하는 간접적 효과도 얻는다. 특히 인텔의 가우디 3이나 AMD의 MI300 시리즈는 최근 AI 인프라 시장에서 점유율 확대를 목표로 하며며, 중국 수출 규제로 인해 미 내수 시장 집중도가 더 커질 수 있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도 반론은 존재한다. 미국 IT혁신재단(ITIF)은 지난해 공개한 보고서에서 “과도한 수출 규제는 공급망 리스크를 증폭시키고, 우회 수요 증가로 중국 자립화만 가속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올해 1월에 공개한 보고서에서도 “GPU의 수출에 제한을 두는 것은 미국 기업의 시장 기회를 제한하고, 중국 AI 칩 제조업체에 시장 점유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최근 보고서에서는 “중국이 수출 통제에 대응해 자국 반도체 혁신 역량을 강화하고 외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전면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분석은 수출 규제가 미국 기업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감소시키고, 반대로 중국 기업의 시장 확대를 촉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中의 대응 시나리오와 반도체 자립화의 현실
중국은 미국의 고강도 규제에 맞서 ‘반도체 자립화’를 국가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다. 지난해 SMIC는 7나노 기반 칩을 자체 공정으로 생산 중이며, 화웨이는 지난해 자체 설계한 AI 칩 ‘Ascend 910B’를 발표했다. 바이두 역시 ‘쿤룬’ 시리즈로 AI 추론용 칩 라인업을 강화 중이다. 하지만 이러한 국산화 시도는 여전히 성능과 호환성 면에서 한계를 보인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엔비디아 칩 기반 CUDA 생태계를 대체하는 소프트웨어 프레임워크가 부족하고, 모델 학습에 필요한 메모리, 인터커넥트 기술도 뒤처져 있다는 것이다. 이에 중국은 당분간 규제 미적용 제품 수입과 자국 칩의 단계적 고도화를 병행하는 이중 전략을 택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번 수출 규제는 단순한 기술 이전 방지 조치가 아니라, 글로벌 기술 질서를 미국 주도로 재편하려는 지정학적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글로벌 공급망은 더욱 단절되고, 기술 이중화가 심화할 가능성도 크다. 한편, 규제 회피를 위한 기술 개발은 오히려 중장기적으로는 양국 모두에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
특히 글로벌 AI 산업은 동일 칩 기반 생태계에 최적화해 있기에, 공급 단절은 모델 호환성·클라우드 서비스 일관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젠슨 황은 중국에서 “AI의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AI 반도체는 단지 연산 능력을 겨루는 경쟁이 아니라, 기술, 외교, 산업 전략이 맞물린 복합전장이 됐다. 이번 수출 규제는 그 시작에 불과하며, 이 싸움의 승자가 누구인지 판단하기엔 아직 이르다.
헬로티 서재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