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하이닉스, 최근 한화세미텍과 10대 규모의 TC 본더 장비 공급 계약 체결
AI 반도체 시대의 주역으로 부상한 HBM(High Bandwidth Memory)이 반도체 업계의 새로운 전선이 되고 있다.
연산 속도와 데이터 처리량을 혁신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HBM은 엔비디아를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가 주목하는 핵심 부품이다. 이를 제조하기 위한 열압착 장비인 ‘TC 본더’의 공급망 안정화는 HBM 경쟁력 확보의 핵심 열쇠로 부상하고 있다. 최근 SK하이닉스가 기존 주력 장비사인 한미반도체 외에 한화세미텍을 추가 벤더로 확보하면서, 업계 전반에 미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최근 한화세미텍과 10대 규모의 TC 본더 장비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총 계약 금액은 약 420억 원 수준으로 추정되며, 이는 HBM3E 12단 양산을 위한 핵심 설비로 활용될 전망이다. 그간 SK하이닉스는 HBM 생산 공정에 한미반도체의 TC 본더 장비를 전량 사용해 왔으나, 이번 계약을 계기로 이원화 전략을 본격화했다.
SK하이닉스의 이번 결정은 단순한 벤더 추가가 아니라, 폭증하는 AI 반도체 수요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한 공급망 재편 시도다. 실제로 한미반도체는 8년간 동결해 온 장비 가격을 약 25% 인상하고, 기존 무상 유지보수 정책을 유료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가격 협상력이 높아진 공급사가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SK하이닉스는 의도적으로 파트너 다변화에 나섰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번 발표는 단기적인 장비 수급을 넘어, 장기적인 기술 안보 및 경쟁력 측면에서 의미가 깊다. HBM 생산량 증가에 따라 TC 본더의 수요도 급증하고 있으나, 한미반도체와의 관계는 순탄치만은 않다. 한미반도체는 지난해 한화세미텍을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SK하이닉스의 공급처 추가 결정은 이 소송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기술 공급망의 불안정성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대응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산업 특성상 단일 벤더 의존은 공급 지연, 가격 협상 실패, 정치적 리스크 등 다양한 문제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SK하이닉스는 글로벌 HBM 시장 점유율 1위를 유지하기 위해 안정적인 생산 체제를 구축해야 할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다.
주목할 점은 SK하이닉스 외에 마이크론 역시 한미반도체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미반도체는 마이크론에 지난해부터 HBM3E 8단용 TC 본더를 대량 공급하기 시작했으며, 올해는 HBM3E 12단 전량도 공급 중이다. 이 과정에서 마이크론이 이미 지난해 전체 물량을 초과한 장비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미반도체 입장에서도 고객사 다변화를 통해 SK하이닉스와의 불균형적인 의존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실제로 한미반도체는 올해 1분기 매출의 90%를 해외 고객사에서 거뒀으며, 글로벌 장비 공급사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 TC 본더 공급 시장에서 기술력과 생산 능력을 모두 입증한 셈이다.
이번 공급망 재편은 결국 리스크 통제의 문제다. SK하이닉스가 한미반도체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완전히 종료하지 않으면서도, 경쟁사 확보로 균형을 맞추려는 점은 산업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복합적 관계 구조다. 이러한 흐름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기술 자립, 비용 효율성 확보라는 삼중 과제를 안고 있는 반도체 기업의 현실을 반영한다.
향후 관심은 오는 24일 SK하이닉스의 1분기 실적 발표에 모인다. 이 자리에서 TC 본더 장비 도입 및 협상 상황이 공식적으로 언급될 경우, 한미반도체와 한화세미텍의 향후 협력 구도, SK하이닉스의 장기적 생산 전략 등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 결국 기술 우위와 수급 안정성이라는 두 축을 얼마나 정교하게 조율하느냐가, AI 시대 반도체 전쟁의 승부처가 될 것으로 보인다.
헬로티 서재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