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탈수도권 이동…충청·호남·영남의 산업 새판짜기
경쟁 아닌 연합, 지역 간 제조업 협력모델의 새로운 해답
한국 제조업의 지도가 조용히 바뀌고 있다. 수도권 과밀로 인한 비용 상승, 환경 규제, 인력난이 겹치면서 제조업체들이 지방으로 이동하고 있다. 동시에 충청권은 첨단산업의 신거점으로, 호남권은 특화산업 중심의 성장지로, 영남권은 고도화된 생산 허브로 각각 재정의되고 있다. 하지만 단순한 ‘이전’만으로는 산업 균형을 달성할 수 없다. 제조업의 다음 과제는 지역 간 연결과 협력, 즉 산업 연합을 통한 지속 가능한 성장이다. 본 기획에서는 한국산업단지공단 정책연구팀이 발표한 「지역 간 제조업체 입지 이동의 결정요인과 경제 효과 분석」 보고서를 토대로 제조업체의 지역 간 이동 요인과 그 결과를 다각도로 분석하고, 향후 균형발전을 위한 제도 개선 방향까지 제시한다.
이동의 배경 : 수도권 피로와 지방의 기회
지난 10여 년간 제조업의 수도권 집중도는 완만히 하락했다. 반면 충청·호남·영남으로의 이전 비율은 꾸준히 증가했다. 그 배경에는 토지비 상승, 노동력 확보난, 환경 규제 강화가 있다. 수도권의 생산거점 유지비용은 중소기업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치솟았고,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이전을 결정했다.
지방자치단체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산업단지 확충, 세제 혜택, 기반시설 지원 등을 통해 기업 유치 경쟁이 가속화됐다. 이로 인해 지방의 산업 지형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충청권은 수도권과의 접근성을 강점으로, 호남권은 저비용·저밀도의 장점을 앞세워, 영남권은 기존 제조 인프라를 기반으로 산업 클러스터를 재편하고 있다.
그러나 수도권의 제조업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은 아니다. 남은 기업들은 첨단화와 자동화로 대응하고 있다. 경기도 화성·평택 일대 반도체 공장은 AI 공정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며 효율을 높이고, 중소 제조업체들은 스마트팩토리를 통해 고비용 구조를 극복하고 있다. 결국 수도권은 ‘생산 중심지’에서 ‘기술·혁신 중심지’로 변모하고 있다.
지역별 산업 재편의 현장
◇ 충청권 : 첨단산업 클러스터의 중심
충청권은 수도권 접근성과 산업 인프라를 동시에 갖춘 ‘황금 입지’로 평가된다. 충북 오창의 LG에너지솔루션 공장은 충청권 산업 이동의 대표적 사례다. 세제 혜택과 기반시설 지원을 바탕으로 공장을 확장하며 지역 고용을 1만 명 이상 늘렸다. 대전·세종 일대는 한화, 삼성디스플레이, 현대모비스 등 대기업의 첨단소재 및 부품 산업이 집결하며 ‘첨단산업 벨트’로 자리 잡고 있다. 다만 숙련 인력 확보와 청년층 정착률이 낮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충청권은 산학연 협력 네트워크 구축에 나서고 있다.
◇ 호남권 : 친환경 산업으로 체질 전환
한때 산업 이전의 변방이었던 호남권은 이제 스마트그린산단과 에너지밸리를 중심으로 탈바꿈 중이다. 광주의 광주글로벌모터스(GGM)는 완성차 업계 최초의 ‘지자체-기업 합작형 공장’으로, 지역 고용 창출의 모범사례로 꼽힌다. 나주의 LG화학, 전북 익산의 식품가공 단지 등도 호남형 산업 생태계를 강화하고 있다. 호남권은 ‘저비용 생산기지’에서 벗어나, 친환경·바이오·소재 중심 산업 구조로 체질을 전환하고 있다.
◇ 영남권 : 기술 축적과 글로벌 경쟁력의 허브
울산·부산·경남 일대는 여전히 대한민국 제조업의 심장부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은 지능형 모빌리티 제조 플랫폼으로 전환 중이며,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는 고부가가치 LNG선 중심으로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창원국가산단은 스마트기계 산업의 중심지로, 구미는 전자·배터리 산업으로 재도약 중이다. 영남권은 ‘전통 제조의 심장’에서 ‘기술 혁신의 실험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동에서 연결로 : 지역 간 산업 연합이 답이다
산업의 이전은 균형발전의 출발점일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각 지역이 경쟁하는 대신 산업 기능별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른바 ‘산업 연합(Industrial Alliance)’ 모델이다.
충청권의 첨단소재, 영남권의 기계·조선·배터리, 호남권의 친환경 에너지 산업이 유기적으로 연계된다면, 국가 차원의 제조 생태계가 하나의 가치사슬로 완성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을 기반으로 정부는 ‘권역별 초광역 산업벨트’를 추진 중이다. 충청권 메가산단, 남동권 산업벨트, 호남 에너지밸리 등은 단순한 물리적 이전이 아닌 산업 기능의 분업·연결화 전략이다.
산업 연합의 성공 조건은 세 가지다. 첫째, 산업사슬의 연계다. 지역별 밸류체인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각 지역이 산업 생태계의 한 축이 되도록 설계해야 한다. 둘째, 인재·기술의 공유다. 산학연 협력 네트워크를 통해 지역 간 기술과 인력이 순환해야 한다. 셋째, 정책의 연속성이다. 협력모델은 단기 인센티브가 아니라, 최소 10년 단위의 장기 비전 속에서 유지되어야 한다.
결국 산업 이전은 ‘어디로 옮길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동한 뒤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의 문제로 진화하고 있다.
제조업의 미래는 연결의 구조에 달려 있다
한국 제조업은 지금 ‘이전의 시대’를 넘어 ‘연결의 시대’로 진입했다. 각 지역이 고유의 산업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기술·인재·공급망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일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균형발전이 가능하다.
수도권의 기술혁신, 충청권의 첨단소재, 호남권의 친환경 에너지, 영남권의 기술집약형 생산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산업 연합 구조’가 대한민국 제조업의 새로운 경쟁력이 될 것이다. 이제 산업정책의 방향은 단순한 분산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연결과 협력의 설계로 옮겨가야 한다.
헬로티 임근난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