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를 새로 시작하는 순간은 즐겁다. 특히 설계단에서 새로운 제품을 구상하고 성능 목표와 디자인 콘셉트를 기획하며 기대감에 부푼다. 하지만 현실의 변수가 등장하는 순간 상황은 반전된다. 일정·예산, 규격·인증, 제조 가능성· 원가 구조 등이 한데 얽히면, 설계자는 도면과 형상 대신 각종 문서 파일에 함몰될 수 있다. 수많은 프로젝트가 이 지점에서 동력을 상실하는 이유다.
캐나다 출신의 엔지니어 겸 크리에이터 제이 보글러(Jay Vogler)는 이 흐름을 5단계의 곡선으로 정의한다. 프로젝트는 ‘설렘(Idea hits)’에서 출발해 ‘복잡함(Problems begin)’과 ‘좌절(Pit of despair)’의 구간을 거치고, 다시 ‘몰입(Flow)’을 지나 ‘사후 확신(Finish)’에 도달한다. 핵심은 이 곡선의 완주 빈도와 끝맺음, 그리고 그 경험이 개인의 기억을 넘어 조직의 자산으로 치환되는지 여부다.
프랑스 소재 시뮬레이션 및 3차원(3D) 설계 솔루션 업체 다쏘시스템(Dassault Systèmes)의 에노비아(ENOVIA)·시뮬리아(SIMULIA)·델미아웍스(DELMIAWorks)는 이 곡선의 복잡한 과정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다. 프로젝트를 끝까지 견인하는 과정에서 데이터, 물리 법칙, 공장, 재무 등을 각각 책임지는 계층적 프로세스로 작동한다.
‘설렘’, 에노비아가 설계하는 프로젝트 기반
프로젝트 초기에는 정보가 산재해 있다. 고객 요구사항, 내부 사양서, 규격과 인증 기준, 자재명세서(BOM) 구조, 자원 조달(Sourcing) 전략, 품질 목표, 회의록, 이슈 목록 등이 각기 다른 시스템에 흩어져 있다. 이는 설계자가 현재의 개발 목표를 직관적으로 조망하기 어려운 환경을 조성해 설계 시작부터 효율을 저하시킨다. ‘설렘’이 ‘혼란’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다쏘시스템의 거버넌스·협업 프로세스 시스템 ‘에노비아’는 이 초기 구간의 프로세스를 정립하도록 돕는다. 제품 요구사항, 기능 구조, 일정·담당자, 품질·규제 이슈, 변경 이력 등을 단일 공간으로 통합한다. 설계·구매·품질·제조·서비스 부문이 사용하는 용어와 우선순위를 공통의 데이터 모델 내에서 동기화하는 기능도 병행한다.
야닉 오두아(Yannick Audouir) 다쏘시스템 에노비아 연구개발(R&D) 부문 부사장은 “가장 좋은 거버넌스는 설계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환경”이라며 “사용자는 본인 일에 집중하고, 권한·승인·변경 흐름은 시스템이 뒤에서 조용히 정리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프로젝트 운영체제와 같다. 버전 승인 권한, 변경 요청의 합의 이력, 부품별 규격 충족 여부 등을 에노비아가 후방 체계(Back-end)에서 통제한다. 설계자는 해결해야 할 문제와 주어진 제약 조건에만 집중할 수 있다.
또 기반을 확립한 후 초기 아이디어를 구체화된 구상으로 구현하는 데 추진력을 더한다. 책임, 일정, 규격 및 품질 목표를 수반한 실질적 프로젝트로 전환하는 것이다. 설렘이 복잡한 현실로 전이되는 이 첫 구간을 에노비아가 단단한 설계 궤적으로 정렬하며 완주를 위한 동력을 확보하도록 돕는다.
‘복잡함’과 ‘좌절’, 시뮬리아가 지탱하는 물리적 한계
프로젝트가 구체화될수록 설계자는 물리의 한계에 직면한다. 형상이 복잡해지고, 하중 케이스, 경계 조건, 접촉·피로, 유동·열, 충돌·진동 등 숱한 변수가 쏟아진다. 이 과정에서 해석과 시뮬레이션은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높은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 사용자는 모델 정리, 메시(Mesh) 분할, 재료 모델 선정, 다중 반복 계산 등을 수행하는 동안 에너지를 누적해 소진한다. 다양한 프로젝트는 여기서 정체된다.
다쏘시스템 솔루션 라인업에는 이 장벽의 돌파를 위한 물리 엔진이 있다. 다중 물리 시뮬레이션 솔루션 ‘시뮬리아’는 구조해석(FEA)·유동해석(CFD)·피로·충돌·전자기·음향 등 다양한 물리 현상을 모델링·시뮬레이션 통합(MODSIM) 철학으로 결합한다. 설계·해석을 단절된 단계가 아닌, 순환하는 단일 프로세스로 통합하는 방법론이 그 기반이다.
다쏘시스템의 컴퓨터지원설계(CAD) ‘솔리드웍스(SOLIDWORKS)’와 같은 CAD 모델을 수정하면, 시뮬레이션 시나리오가 자동 갱신된다. 또 해석 결과가 다시 설계 조건에 반영되는 구조다.
미셸 애시(Michele Ash) 다쏘시스템 시뮬리아 최고경영책임자(CEO)는 “과거에는 해석팀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타협선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면, MODSIM과 인공지능(AI)을 결합한 지금의 시뮬리아는 설계자가 가상 세계에서 수백 가지 설계를 시험해 보고 자신이 원하는 지점까지 프로젝트를 유지하도록 지원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사용자가 이 물리 데이터를 믿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결과를 설계 결정에 바로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점을 덧붙여 강조했다.
이 같은 AI 기반 자동화가 더해지면 복잡함·좌절 과정을 야기하는 진입 장벽은 낮아진다. 예를 들어 복잡한 낙하시험의 제반 조건을 일일이 설정하는 대신, 목표 환경을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목적 지향적 지시만으로 테스트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설계자가 검증 상황과 안전 목표를 제시하면, 세부 파라미터와 과거 사례 검색은 시스템이 처리하는 식이다.
여기에 다쏘시스템이 올해 처음 공개한 레오(LEO)·마리(MARIE) 등 ‘가상 동반자(Virtual Companion)’는 이 과정에서의 핵심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다쏘시스템이 주창하는 가상 동반자의 개념은 설계 화면 안에서 사용자와 대화하며 정보를 찾고 모델을 바꾸고 시뮬레이션을 준비해 주는 AI 조수다.
앞서 언급한 레오는 형상·시뮬레이션·제조를 잇는 작업 순서를 제안하며, 마리는 소재·규제·지속가능성 같은 과학 기반 의사결정을 돕는 역할을 맡는다.
특히 레오는 형상·시뮬레이션·제조를 연결하는 최적의 프로세스를 제안한다. 반복적인 해석 셋업과 병목 구간을 식별한다. 보강 설계가 필요할 때, 레오는 적합한 형상 변경과 해석 조합을 즉각적으로 산출해 제시한다.
이처럼 시뮬리아와 관련 도구는 설계자가 물리의 벽을 넘도록 돕는 핵심 엔진으로 활약 중이다. 에노비아가 정립한 제약 조건을 물리 세계에서 반복 검증하며, 복잡함과 좌절의 구간에서도 프로젝트의 추진력을 유지한다.
‘몰입’과 ‘사후 확신’, 델미아웍스·에노비아가 완성하는 루프
이렇게 좌절을 극복하면 프로젝트는 다시 가속화된다. 설계·시뮬레이션이 안정화되고 시제품(Prototype)이나 시범모델(Pilot) 생산 단계로 진입한다. 이때 설계자는 방향성에 대한 확신을 되찾는다. 제이 보글러 곡선의 최종 단계인 사후 확신은 생산, 납품, 시장 반응을 포괄하는 ‘프로젝트 최종 보고서’다.
디지털 제조 및 운영 최적화 솔루션 ‘델미아(DELMIA)’의 제조실행시스템(MES)·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 ‘델미아웍스(DELMIAWorks)’는 이 후반부를 수치·프로세스로 결속한다. 생산 계획, 공정, 설비 가동률, 재고·품질, 납기·원가 정보를 통합해 지능적 운영(Intelligent Operations)을 가능케한다. 설계 단계의 가설적 생산성과 비용 구조가 실제 공장 데이터로 입증되는 순간이다.
마이크 버클리(Mike Buchli) 솔리드웍스 부사장은 델미아웍스를 중소·중견(Small and Medium-sized Business 이하 SMB) 제조기업용 ERP·MES 접근법이라고 설명하며 “이 같은 SMB 시스템에서 진짜 어려운 부분은 기능 자체가 아니라 변화 관리(Change Management)”라고 짚었다.
이어 그는 “무엇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끝까지 추적할 수 있는 공장일수록 새로운 플랫폼으로의 전환이 훨씬 수월하다”고 말하며, 설계·생산·품질·비용 데이터를 한데 통합하는 추적 가능성이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부연했다.
실제로 델미아웍스는 특정 소재와 공정 선택에 따른 ▲생산 리드타임 증감 ▲불량률·재작업 비율 변화 ▲동일 설계의 공장별 성과 차이를 지속 기록한다. 이 데이터는 다시 설계·시뮬레이션 계층으로 돌아간다. 설계와 공정의 조합이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 객관적 데이터로 축적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에노비아가 다시 역할을 수행한다. 초기 요구사항·제약, 중간 설계 결정, 시뮬리아 물리적 한계 검증, 델미아웍스 생산·운영 지표를 단일 파이프라인으로 합쳐 방대한 지식 그래프를 구축한다. 사측은 선택과 결과의 상관관계, 최적의 성능과 수익성을 보장하는 조합이 다음 프로젝트의 표준 템플릿으로 저장된다고 내세운다.
완주된 프로젝트는 일회성 경험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에노비아·델미아웍스를 통해 관리된 모든 작업 기록은 실행 가능한 데이터와 업무 규칙으로 시스템에 영구 저장된다. 따라서 후속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 없이, 이미 검증된 이전 프로젝트의 데이터 세트를 그대로 가져와 즉시 실행할 수 있다.
지식 압축 공장, 도메인 룰이 데이터가 되는 순간
앞선 모든 워크플로에서의 핵심은 ‘데이터 본질’이다. 데이터는 기존처럼 단순한 공정 간 기록에 머물지 않고 규칙과 판단의 집합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각 조직은 보이지 않는 고유의 룰을 지닌다. 특정 볼트 규격을 금지하거나, 용접 대신 볼트 결합을 선호한다. 30% 이상의 안전율을 요구하는 조직이 있는 반면, 규격 상한선까지 경량화를 추구하는 조직도 있다. 같은 소재라도 환경 규제를 우선시하거나, 가격과 납기를 먼저 따진다.
이러한 선택과 패턴은 데이터로 치환 가능한 지식이다. 설계 템플릿, 사양서, 해석 마진, 승인 기준, 생산·품질 의사결정에 녹아든 룰이 곧 지식으로 연결된다는 뜻이다. 이전의 다쏘시스템 세 솔루션은 이 룰을 반영해 도메인 특화 기술 체계를 구축하는 도구로 활약하고 있다.
이때 조직의 고유한 룰을 가동하는 데이터의 순도가 결정된다. 공개 데이터로 학습한 범용 모델로는 특정 조직만의 고유한 설계 문법과 운영 노하우를 시뮬레이션할 수 없다. 결국 프로젝트의 완주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외부의 방대한 정보보다, 각 조직만의 설계 습관과 공정 규칙이 투영된 지식 구조다. 이러한 전용 동력의 확보 여부가 곧 제조 경쟁력의 격차로 직결된다.
이 구조는 거대한 지식이 압축된 공장과 같다. 수많은 결정과 실험, 성공과 실패의 패턴을 누적한다. 조직의 설계·검증·운영 관련 지식을 한곳에 압축·정렬하는 인프라다. 프로젝트를 한 번 완주할 때마다 검증된 지식의 '최적화된 묶음(Batch)'이 생성된다. 이 데이터 패키지는 다음 프로젝트 엔진을 가동하는 핵심 연료로 재투입된다.
물론 지적재산권(IP)과 보안은 필수 전제다. 설계 룰과 노하우는 조직의 핵심 경쟁력이자 자산이기에 시스템 외부로 유출되지 않는 폐쇄형 지식 구조 내에서 관리돼야 한다. 결국 다쏘시스템이 내세우는 거버넌스는 이러한 유무형 자산을 보호하는 동시에, 이를 최적의 설계 엔진으로 변환해 조직의 독점적 기술 우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고도의 프로세스인 셈이다.
이러한 폐쇄적 보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시스템 내부의 통제다. 시스템 안에서 자산이 활용될 때 데이터 사용처, 모델 영향력, 삭제·추적 가능성 등이 명확히 규정되어야만 프로세스에 대한 신뢰가 형성된다.
결과적으로 이제 축적한 데이터의 절대적 양은 부차적인 문제다. 사용자의 지식을 얼마나 안전하게 격리하고, 설계 엔진의 가동 범위 내에서만 정밀하게 작동하게 할 것인지가 제조 거버넌스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지표가 될 전망이다.
결국 에노비아·시뮬리아·델미아웍스가 구동하는 백엔드 체계는 프로젝트 완주의 흔적을 휘발성 지식이 아닌, 조직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데이터·매뉴얼로 저장된다. 개인의 고군분투를 시스템의 규칙·패턴으로 변환해, 다음 프로젝트가 더 높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도록 표준 가이드라인을 재공급하는 것이다.
프로젝트를 완주하는 주체는 여전히 인간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쌓인 성공 사례와 판단 근거를 데이터로 바꿔 실질적인 기술 격차를 만드는 일은 이제 시스템의 몫이다. 개인이 일일이 기억하고 관리하던 기술 노하우를, 시스템이 자동 분류·자산화해 조직의 독보적인 경쟁력으로 각인하며 프로젝트의 ‘마침표’를 찍는다.
헬로티 최재규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