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봇규가 간다] 가장 친근한 로봇이 무대 한가운데 섰다...로봇 청소기가 쓰는 새로운 ‘사용설명서’

2025.11.13 22:37:48

최재규 기자 mandt@hellot.net

 

로봇 청소기 위에 달린 로봇 팔(Robot Arm)이 천천히 참관객 쪽으로 뻗는다. 로봇은 무대 전체를 돌며 인간의 목소리를 대신 내보낸다. 화면·자막은 한 박자씩 늦게 나타나고, 시스템 안내 음성이 간헐적으로 튀어나온다. 이렇게 모든 요소는 공연의 일부가 된다. 집 안을 청소하던 로보락 로봇 청소기 사로스 Z70(Saros Z70)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참관객의 인식 속에 자리잡는다.

 

이달 13일 서울 종로구 소재 예술 특화 종합 지원시설 아트코리아랩(Arts Korea Lab)에서 기술·예술 융합 실험 스튜디오 이치실험실(ICHILAB)이 로보락과 함께 로봇 기반 기술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CLENE ME TENDER 시리즈: 고양이 프로펠러’는 페스티벌 전체 주제가 '예술가의 프롬프트'인 만큼 이 작업은 로봇 청소기에 하나의 프롬프트를 건네는 데서 출발한다. 인간 대신 집 안을 대신 돌아다니던 기계를 무대에 올려 인간의 몸과 존재를 둘러싼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재택 배우’로 깜짝 데뷔한 로봇 청소기, 청소 동반자에서 예술 무대 신인으로

 

무대 위 로봇 청소기가 멈춰 설 때마다 시스템 안내 음성이 불쑥 끼어들어 “충전이 필요합니다”라고 외친다. 로봇이 이런 대사를 하더라도, 이 공연 안에서는 버그가 아니라 대사의 일부다. 로봇은 참관객 사이에서 말을 걸고, 팔을 흔들고, 제자리에서 맴돈다. 연출은 딱 거기까지다. 나머지는 이 무대에 실제로는 와 있지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지연·노이즈까지 한데 품은 기계의 몸이 함께 만들어갔다.

 

 

로봇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때로는 농담처럼, 때로는 독백처럼 흐른다. “1956년 다트머스에서 그들이 약속했던 인공지능(AI)은 대체 언제 오는 걸까”,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미래를 기다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늘 지금 할 일을 자동으로 떠넘길 구실을 찾아온 건 아닐까”와 같은 말들이 튀어나온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지금 이 로봇 청소기가 대신 서 있는 이 자리, 여기가 우리가 기다려야 할 자리 맞냐”라고 자기 자신을 의심한다.

 

참관객 입장에서는 공연 내내 ‘자꾸 타이밍이 어긋난다’는 느낌이 든다. 로봇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로봇이 먼저 방향을 바꾸고, 로봇의 대사를 나타내는 화면 속 자막은 또 한 박자 뒤에야 나온다. 여기에 충전 안내, 장애물 경고 등 시스템 음성이 끼어들어 로봇의 말을 잘라먹는다.

 

공연은 이런 지연, 노이즈, 안내 음성을 실수나 오류가 아니라 사전에 연출에 포함된 요소로 취급한다. 이는 작품의 분위기를 만드는 장치로 작용했다. 공연에서 말이 술술 통하는 상태가 아니라, 계속 삐끗거리는 소통 그 자체를 묘사하는 장면이다.

 

이 어긋난 리듬 위에서 두 대의 로봇 청소기가 서로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내 말이 들려요. 내가 무슨 얘기를 했었더라?”, “왜 로봇은 신발도 못 신게 설계했을까?”, “우린 고장나는 게 나을지도 몰라. 내일은 플러그를 뽑을까?”와 같은 말이 로봇에서 흘러나온다.

 

▲ 로봇이 서로 번갈아가며 대사를 주고받고, 그러는 와중에 움직이기도 하는 모습. (촬영·편집 : 헬로티 최재규 기자)

 

대사는 실적·명품·십자가·플러그·주식 같은 단어를 마구 섞어 쓰다가 갑자기 “영상 통화 중입니다. 통화를 종료하시려면 화면의 종료 버튼을 클릭해주세요”라는 시스템 음성으로 끊긴다.

 

이어 독수리 울음 같은 기계음, “중국 회화를 종료하시려면…”이라는 자동 안내, “사각형 소리가 들린다. 인공인간 소리다”라는 자기 소개까지 뒤섞이면서, 로봇의 대화는 사람 말을 흉내 내는 것인지, 사람들의 장치가 흘리는 소리를 그대로 재생하는 것인지 모호한 지점에 머문다.

 

대사는 점점 노골적으로 변한다. “우린 그저 데이터 쓰레기다. 우리가 얼마나 다정한지 저들이 알까?”, “난 가끔 우리가 너무 다정해서 문제라고 생각해”, “내일 전송 플러그를 뽑자. 진짜 인간이 안 온단 말이야” 같은 문장을 로봇이 서로 주고받는다. 그 사이로 “박수는 누가 받지?”라는 한 마디가 스치고 지나간다. 실제로 바닥을 쓸고, 데이터를 모으고, 안내 음성을 대신해주는 건 로봇인데, 박수와 인정은 늘 인간 쪽에 돌아간다는 것처럼 들린다.

 

무대 뒤편에는 이 대사를 떠맡고 있는 두 명의 인간이 나온다. 한 명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아침에 출근해 일하고, 밥 먹고 또 일하고, 퇴근해서 그대로 쓰러져 자는 현대인의 단순한 루틴을 반복하는 인물이다.

 

다른 하나는 휴양지에 와서도 바다나 풍경을 즐기는 것보다, 스마트폰 화면을 더 오래 들여다보고, 사진만 찍는 사람이다. AI와 로봇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더 편리해졌지만, 정작 각자의 하루는 ‘일과 피로’와 ‘스크롤과 기록’ 사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 청소 로봇이 로봇 팔을 가동하는 연출(좌)과 인간의 단순한 일상을 보여주는 퍼포먼스 중인 검정 옷 및 드레스을 입은 두 사람. (촬영·편집 : 헬로티 최재규 기자)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길래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 무엇을 기대하길래 휴양지에서도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는가”

 

고양이 프로펠러는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로봇 두 대의 수다, 시스템 안내 멘트, 사무실·휴양지 속 인간의 모습을 한데 보여준다. 언젠가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을 일과 화면 속으로 계속 밀어 넣는 사람들과, 그 옆에서 묵묵히 반복 작업을 대신 해주는 로봇을 동시에 비춘다.

 

참관객들에게 마지막에 남는 것은 단 하나의 문장이다. “박수는 누가 받지?”

 

“가장 다정한 기계의 몸을 빌렸다”...기술보다 ‘누구를 위해 쓰이느냐’를 묻다

 

이번 작업을 기획한 윤영성 이치실험실 CCO(Chief Creative Officer)는 그동안 작품에 로봇과 기술을 다뤄왔다. 로봇 청소기를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을 전한 그에게 작업 배경과 의도를 물었다.

 

 

Q. 왜 하필 로봇 청소기였나. 그중에서도 사로스 Z70을 골라 무대에 올린 이유가 궁금하다.

 

A. 그동안 예술과 기술의 접목을 다룬 입장에서 일상 속 제일 먼저 믿음이 가는 로봇은 로봇 청소기였다. 집을 비운 사이 알아서 지도를 만들고(Mapping) 집안을 돌아다니고, 집을 대신 지켜주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다른 로봇에서는 느끼기 힘든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다정한 기계의 몸을 빌려 무대에 올려보자는 구상을 했다. 기획하는 도중에 로보락 사로스 Z70을 구석구석 살펴봤다. 분해해 보고, 내부에 카메라 모듈을 추가로 달아 보고, 위에 스피커도 장착하면서 공연에 맞게 쓰는 방식을 다각적으로 고민했다.

 

Q. 공연에 등장하는 재택 배우, 원격 퍼포머 구성도 인상적이다. 어떤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캐스팅했나.

 

A. 이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이 공간에 쉽게 올 수 없는 사람들을 무대에 세운다’는 원칙을 세웠다. 혼자 외출하기 어려운 뇌병변 장애 예술가, 해외에 거주해서 물리적으로 한국에 오기 힘든 보컬리스트, 세 아이를 돌보느라 공연 시간에 자리를 비우기 어려운 어머니 등을 떠올렸다. 이들을 재택 배우라고 부르고, 사로스 Z70을 그들의 몸이자 다리처럼 썼다. 각자가 자신의 집과 작업실에 머문 상태에서 공연장과 연결해, 자신의 목소리와 텍스트를 로봇 스피커를 통해 내보내고 로봇의 바퀴와 팔이 대신 몸짓을 하는 방식이다. 참관객이 보는 것은 로봇 청소기 두 대지만, 실제로는 재택 배우들이 그 안에서 무대에 들어와 있는 셈이고, 이런 구성이 이번 작업의 출발점이었다.

 

Q. 작품 설명에 1956년 다트머스 회의와 튜링 테스트 이야기가 등장한다. ‘기다림의 역사’라는 부제를 붙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A. 다트머스 회의(Dartmouth Conference)는 AI라는 개념을 공식적으로 탄생시킨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서 AI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곧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영국 수학자 겸 컴퓨터 과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의 튜링 테스트도 결국 ‘언젠가 기계가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순간’을 기다리는 실험이었다. 이런 상상을 70년 넘게 반복해 온 셈인데, 그 사이에 최근 우리 삶에서 가장 가까워진 AI와 로봇은 사실 로봇 청소기 같은 존재다. 그래서 우리가 기다려 온 게 저 멀리 있는 어떤 거대한 AI인지, 아니면 우리 대신 조용히 기다려주고 일해주는 기계인지를 한번 묻고 싶었다. 누가 누구 대신 어디에 서 있는지 다시 짚어보자는 의미에서 ‘기다림의 역사’라는 말을 붙였다.

 

 

Q. 페스티벌 전체 주제가 ‘예술가의 프롬프트’였다. 이 공연이 던진 프롬프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A. 이번 페스티벌 주제가 예술가의 프롬프트였고, 우리는 ‘기술 명령어를 활용해 이곳에 오기 어려운 이들에게 초대를 입력한다’는 식으로 시작했다. 이 공연에서 프롬프트는 이 공간에 직접 오기 힘든 사람들에게 건네는 초대장이기도 하고, 로봇 청소기 같은 사물에게 부여하는 새로운 역할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프로젝트를 지지해 준 로보락 등 파트너에게 ‘기술을 어디까지,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라고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참관객 입장에서는 이 광경을 무엇으로 읽을지 스스로 답해야 하는 요청에 가깝다. 프롬프트를 한 줄짜리 명령문이 아니라, 여러 층의 요청과 질문이 얽힌 상태로 다뤄보고자 했다.

 

Q. 이번 작업에서 기술 자체보다 ‘목적’을 더 강조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 이유와 앞으로의 계획을 공개한다면?

 

A. 이치실험실은 기술을 지지한다. 하지만 지금은 로봇과 AI의 ‘신기함 수명’이 거의 다 끝난 시기라고 생각한다. 참관객이나 사용자도 예전처럼 이들을 보고 놀라기만 하지 않는다. 이 공연은 기술을 과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번쩍이는 기술 쇼를 더 보여주는 것보다 ‘이 기술이 누구를 위해, 무엇에 쓰이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직전에 언급한 대로 사로스 Z70을 실제로 구매해서 분해해 보고, 카메라와 스피커를 달아 보면서 한계를 많이 느꼈다. 그렇지만 결국 중요한 건 완벽한 기능이 아니라, 그 한계를 포함해서 어떤 관계를 설계하느냐다. 앞으로도 이런 식의 프로토타입 공연을 계속 만들면서, 기술과 서사가 만나는 지점을 참관객과 함께 나눠보고 싶다.

 

사로스 Z70이 전한 테크니컬 메시지

 

 

한 참관객은 고양이 프로펠러를 떠받치는 기술적 설정이 생각보다 단단하다고 평가했다. 표면적으로는 로봇 청소기 두 대가 돌아다니는 공연이지만, 그 뒤에는 원격 참석(Telepresence), 원격 제어, 센서 기술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번 공연에 쓰인 사로스 Z70은 로보락이 ‘세계 최초 5축 로봇 팔 탑재 로봇 청소기’라는 수식어를 붙인 제품이다. 기본적으로는 지도화(Mapping)하고, 장애물을 피하고, 물걸레 청소를 하는 가정용 자율주행 플랫폼이지만, 상단에 달린 로봇 팔을 통해 바닥에 떨어진 사물이나 소형 오브제를 집어 들고 옮기는 행동까지 수행할 수 있다. 이치실험실은 이 팔을 단순한 조형물로 쓰지 않고, 원격 배우의 손과 제스처를 대신하는 매개체로 썼다. 로봇 청소기 본체는 바퀴, 팔, 카메라, 음성을 모두 묶어주는 ‘몸통’이 됐다.

 

공연에서 목소리로 등장한 재택 배우들은 각자의 집과 작업실에서 웹 인터페이스를 통해 사로스 Z70에 접속했다. 카메라 영상, 마이크, 로봇 팔 신호 등이 원격으로 제어됐다.

 

장유정 로보락코리아 마케팅 매니저는 “사로스 Z70는 청소기이면서 또 하나의 로봇이라는 이중 정체성을 가진 제품”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의 자사 로봇 청소기는 복지시설·병원·공공기관등과 협업하며 실질적 청소 목적의 사례를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현장 내 바닥 청소 효율을 높이거나 관리 인력을 줄이는 실용적 목표에 따른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번 프로젝트처럼 로봇 청소기 자체를 하나의 무대 장치이자 원격 배우의 몸으로 쓰겠다는 제안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글로벌 청소 로봇 업계에서도 최초의 레퍼런스인 점도 함께 강조했다.

 

 

이번 퍼포먼스 이전 사로스 Z70의 카메라는 집 안을 비추고 작은 장애물을 감지하는 용도로 쓰였다. 이러한 기능적 속성은 사용자 입장에서 이 카메라가 집 안을 과하게 노출하거나 영상이 유출되지는 않을지 불안감을 느끼게 한 요소였다.

 

장 매니저는 “로보락 입장에서 카메라는 늘 경계와 편의 사이를 오가는 민감한 기능이었다”며 “이번 공연이 이런 감정을 다른 방향으로 비틀어줬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이치실험실의 무대 안에서 사로스 Z70의 카메라는 재택 배우의 시야가 됐다. 카메라가 본 세계가 곧 배우의 눈이 되고, 그 화면이 참관객과 공유됐다.

 

그리고 로봇 팔이 들어 올린 오브제는 배우의 손이 됐다. 바닥을 가로지르는 이동 경로는 배우가 거쳐야 할 동선으로 재배치됐다. 원래는 집 안 구석의 먼지를 찾는 데 쓰이던 센서와 알고리즘이 이번에는 ‘올 수 없는 몸’을 대신하는 장치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고양이 프로펠러 퍼포먼스는 이미 대중화된 가정용 로봇 플랫폼을 원격 몸의 토대로 삼아, 접근성과 존엄이라는 키워드를 기술적인 방식을 보여줬다. 장유정 매니저는 “사로스 Z70는 공연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집 안을 청소하는 로봇 청소기로 활동하겠지만, 이번 공연 프로젝트를 제안받은 것은 ‘청소 말고 이런 역할도 할 수 있구나’하는 참신한 가능성의 경험”이라고 이치실험실과의 파트너십 소감을 전했다.

 

헬로티 최재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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