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차량용 반도체는 어떤 제품보다 비싼 몸값을 자랑했다.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차량용 반도체 부족 현상은 완성차 업계에 뼈아픈 타격을 남기기도 했다. 현재는 차량용 반도체 공급이 대부분 정상화했으나, 제품이 갖는 가치는 지속해서 높아지고 있다. 증가하는 전기차 및 자율주행차 수요와 SDV(Software Defined Vehicle)로의 전환은 차량용 반도체 생산량과 시장 확대를 담보한다. 이에 주요 국가 및 기업은 차량용 반도체 역량 강화를 위한 전략을 펼쳤다.
팬데믹 이후 지칠 줄 모르는 성장세
시스템 반도체로 분류되는 차량용 반도체는 자동차의 센서, 엔진, 제어장치 및 구동장치 등 핵심 부품에 사용되는 필수 요소다. 차량용 반도체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 사건은 단연 코로나19였다. 반도체 공급망을 마비시켰던 팬데믹 기간은 완성차 기업에 있어 그야말로 보릿고개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역시 반도체 수요 부족 현상을 장기화하는 요인이 됐다.
이후 주요 기업들은 다시 발생할지 모를 공급망 마비에 대비해 차량용 반도체 생태계 구축에 나서고 있다. 이뿐 아니라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의 전환은 차량용 반도체 시장을 확대시키는 주요 동인이 됐다. 일반적으로, 내연기관 차량에 사용되는 반도체 수는 약 300개에 이른다. 전기차에는 1000여개의 반도체가 사용되며, 자유주행차의 경우 최소 2000여개의 반도체가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높은 시장성에도 불구하고, 차량용 반도체에 대한 진입장벽은 상당히 높다. 주된 이유는 사용자 안전과 직결된다는 점이다. 산업용 반도체, 컴퓨터 및 스마트폰에 쓰이는 반도체보다 높은 수준의 안정성과 내구성이 요구된다. 한 예로, 차량용 반도체는 고온, 저온, 고습, 진동 및 충격과 같은 극한 환경 조건에서 작동한다.
이를 견디기 위한 내구성 연구 및 개발이 필요할 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신뢰성을 검증할 때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 안전성 측면에서 보안에 대한 신뢰도 빼놓을 수 없다. 차량은 해킹으로 인한 악용이나 피해를 방지하는 개발 및 인증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외에도 낮은 수익성, 긴 교체 주기 등의 요인은 기업이 차량용 반도체 개발에 쉽사리 뛰어들 수 없게 만든다.
진입장벽과 무관하게도,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확장하고 있다. 옴디아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차량용 반도체 시장 규모는 635억 달러를 돌파했고, 2026년에는 962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이와 함께 차량용 반도체도 메모리 반도체와 같이 초미세 공정으로 향하고 있다.
기존 차량용 반도체는 30㎚ 이상의 레거시 공정에서 주로 양산됐으나, 점차 CPU를 탑재한 10nm 이하의 고성능 칩으로 변화하고 있다. 반도체는 일반적으로 공정이 미세화할수록 작아지고 발열량도 감소한다. 이처럼, 초미세 공정은 전기차 성능 향상과 유관한 관계에 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는 소비자 가전, 자동차, 산업 분야에 사용되는 전력 및 컴파운드 반도체 수요 증가로 파운드리 산업도 성장세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SEMI 관계자는 “전기차 보급 확대로 전기차에 들어가는 반도체 수요가 증가하는 추세다”며 “이에 보쉬, 인피니언 등 차량용 반도체 주력 기업들이 생산 능력을 확장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와 함께 차량용 및 전력 반도체 팹 생산능력이 올해부터 2026년까지 34%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속적인 시장 확대와 생태계 구축 필요
우리나라는 최근 차량용 반도체 기술 개발과 시장 확장을 위해 주요 국가 및 기업과 협력 관계를 만들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지난 10월 18일 독일 뮌헨에서 국내 기업의 유럽 반도체 공급망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한·유럽 반도체 데이(KESD)’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에는 국내 반도체 소부장 기업 20곳과 독일 등 유럽 반도체 관련 기업 20곳 등이 참가했다. 인피니언 테크놀로지, 인텔, BMW, 비테스코 등의 기업이 참여했다.
이날은 유럽 반도체 기업의 구매 정책 및 협업 전략, 기술 동향, 현지 진출 사례가 발표됐으며,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납품과 협력 방안도 논의됐다. 코트라는 반도체 산업 영향력을 키우는 유럽에서 국내 기업이 설비투자 초기 단계에서 편입되도록 지원했다. 특히 국내 기업들은 반도체 후공정 분야 등에서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현지 기업의 수요를 기회로 삼았다.
국내 자동차 업계는 싱가포르와 차세대 모빌리티에 관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여기서도 차량용 반도체 개발의 당위성이 언급했다. 지난 10월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와 싱가포르제조연합회(SMF)는 ‘한-싱가포르 미래 모빌리티 비전 및 발전전략’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에서는 탈탄소화와 전동화에 따른 모빌리티 산업 변화에 맞춰 한국 기업이 싱가포르를 포함한 동남아와 손잡고 성장의 기회를 찾아야 한다는 논의가 이뤄졌다.
특히 주제 발표를 담당한 나승식 한국자동차연구원 원장은 “미래차 시장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차량용 반도체와 소프트웨어 기술 강화, 내연기관 부품기업 전환 등이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승식 원장은 “현대자동차그룹이 싱가포르 주룽 혁신단지에 짓는 연구개발센터는 싱가포르 친환경차 보급에 기여할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완성차 기업과 현대자동차그룹·기아와 차량용 반도체 기업인 인피니언 테크놀로지(이하 인피니언) 간 협력 발표도 화제가 됐다. 현대차·기아는 지난 10월 18일 인피니언과 전력반도체 전략협업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전력반도체는 전력을 변환하고 제어, 분배해 배터리 사용 시간을 늘리고 전력 사용량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는 친환경차 핵심 부품이다.
이번 계약으로, 현대차·기아는 향후 출시 예정인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모델의 전력 성능 향상을 목표로 인피니언과 기술개발에 협력하기로 했다. 또한, 2030년까지 전기차, 하이브리드 등 전동화 차량 생산에 필요한 전력반도체 물량 중 일부를 인피니언으로부터 공급받기로 했다. 김흥수 현대차 부사장은 체결식에서 “양사 협력으로 중장기 수급 리스크를 해소하고, 신기술을 적용한 경쟁력 있는 제품을 바탕으로 세계 전기차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헬로티 서재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