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은 이미 이전부터 공장 안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다만 그동안의 AI는 품질 검사, 수요 예측, 설비 이상 감지 등 개별 공정을 지능화하는 조연에 가까운 기술로 치부됐다. 최근 1~2년 사이 분위기는 다르다. 생성형 AI(Generative AI)와 에이전트형 AI(Agentic AI)가 이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이들 최신 기술은 설계 문서, 고객 요구사항, 서비스 매뉴얼 등을 읽고 쓰는 업무까지 AI가 담당하면 어떨까 하는 데서 활용 범위를 확장했다. 하지만 생산성 향상을 기대하는 만큼, 잘못된 답 하나가 안전사고와 제품 회수(Product Recall)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도 동시에 커지고 있다.
특히 복잡한 기계·로봇을 만드는 제조사는 고민이 더 깊다. 자동차·항공우주·방산·의료기기처럼 요구사항과 규제가 촘촘한 산업에서는 한 줄의 요구사항, 한 번의 설계 변경, 한 건의 서비스 기록까지 모두 추적 가능해야 한다.
이때 AI를 활용하더라도 어디까지 AI에게 맡기고, 어떤 부분은 작업자가 담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의사결정 없이는 시도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 또한 AI가 참고하는 데이터를 어떻게 신뢰하도록 할지에 대한 고민도 뒤따른다. 최근 제조업에 ‘데이터 파운데이션(Data Foundation)’, ‘디지털 스레드(Digital Thread)’와 같은 기술 요소가 자주 언급되는 이유다.
업계는 그럼에도 많은 기업이 여전히 엑셀과 개별 시스템에 쪼개진 데이터에 의존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이는 설계·생산·서비스 등 제품 생애주기 속 시스템 사이에는 여전히 사람 손으로 메워야 하는 간극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AI를 도입하겠다는 전략은 줄곧 쏟아지지만, 실제로 설계부터 서비스까지 이어지는 전체 제품 라이프사이클을 재정의한 사례는 많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제품 라이프사이클 자체를 AI로 다시 설계하자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미국 디지털 솔루션 및 소프트웨어 기술 업체 ‘PTC’가 AI 열기가 한창인 글로벌 산업에 새 비전을 꺼내 들었다.
PTC는 글로벌 제조·제품 생태계를 대상으로 산업 소프트웨어 기술을 다루고 있다. 이달 4일 ‘인텔리전트 제품 라이프사이클(Intelligent Product Lifecycle)’을 비전으로 한 AI 전략을 발표했다.
김도균 PTC코리아 대표는 이날 열린 자사 연례 파트너십 행사 'PTC 이노베이션 익스체인지 2025(PTC Innovation Exchange 2025)’에서 이 같은 내용을 선언했다. 그는 “기존 컴퓨터지원설계(CAD)·제품수명주기관리(PLM)·애플리케이션 수명주기관리(ALM) 공급사 역할에서 설계·제조·서비스 등 제품 생애주기 전체를 다루는 전사 솔루션 업체로 진화할 것”이라는 청사진을 밝혔다.
제품이 시장에 나간 이후 축적되는 고객 데이터를 AI로 분석해, 다시 설계와 서비스로 돌려보내는 구조가 앞으로 제조 경쟁력을 가를 것이라는 자사 방침에 의한 내용이다.
‘지능형 제품 라이프사이클’의 뼈대부터 세운다
PTC의 인텔리전트 제품 라이프사이클 비전은 이렇다. 제품을 정의하는 순간부터 설계·계획·생산·운영·유지 등 단계의 모든 데이터를 하나의 통합 파이프라인에 모은다. 그리고 이 전체 구조를 따라 각 단계에 AI 기능을 내재화하는 방식이다.
이 메커니즘에서의 핵심은 ‘제품 데이터’다. 이 데이터가 전체 프로세스를 움직이는 엔진 역할을 한다. ▲설계 단계에서 정한 사양, 구조 ▲생산 단계에서 도출되는 공정·품질 데이터 ▲운영·유지 단계에서 나오는 센서·서비스 기록을 하나의 기준에 맞춰 쌓아두는 것이 출발점이다. 이를 통해 그 다음 단계에서 직관적인 의사결정과 프로세스 최적화가 가능하다는 발상이다.
여기서 PTC가 내세운 AI 접근법은 통합된 제품 데이터 위에서 각 단계를 도와주는 묶음 기능에 가깝다.
ALM에서는 자사 플랫폼 ‘코드비머(Codebeamer)’에 탑재된 AI가 사용자 요구사항 문장을 읽고 애매한 표현이나 빠진 조건을 표시한다. 이 과정에서 국제 시스템 엔지니어링 협의회(INCOSE)의 시스템 공학 표준을 반영해 품질 점수를 매긴다. 이후 선택한 기준에 따라 더 명확한 문장 초안을 제안한다.
같은 맥락에서, 선택된 요구사항을 바탕으로 검증 사례의 기본 구조를 자동 생성해 검증 설계를 돕는다.
CAD 파트의 AI 기능은 ‘크레오(Creo)’에 적용된다. 설계자가 목표 체적과 기본 제약 조건만 지정하면 AI가 가능한 형상과 치수 조합을 계산해 모델을 자동으로 재구성해 준다. 과거 설계 데이터와 외부 이미지를 비교해 디자인 패턴을 분석하고, 설계 과정에서 반복되는 명령과 피처를 자동화하는 기능도 함께 덧붙였다. AI가 여러 후보를 제안하면 설계자가 그 가운데에서 선택·수정하는 흐름이다.


▲ 크레오에 이식된 AI 기능은 설계 과정에서의 유연성과 효율성을 제공한다. 대화 방식의 설계 추천과 반복 작업 자동화를 통해 설계자가 여러 후보안을 빠르게 검토·수정할 수 있게 해준다. (촬영·편집 : 헬로티 최재규 기자)
끝으로 PLM 영역에서는 PLM 플랫폼 ‘윈칠(Windchill)’ 기반 ‘윈칠 AI(Windchill AI)’ 기능을 활용한다. 3차원(3D) 형상과 속성 정보를 함께 활용해 유사·동종 부품을 찾아 재사용을 유도하고, 중복 부품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 윈칠에 접목된 유사 부품 검색 및 추천 과정. 해당 기능은 내년 1분기에 본격 출시된다. (촬영·편집 : 헬로티 최재규 기자)
사측은 또 다른 기능으로 '문서 인사이트' 기능도 제공할 계획이다. 이 기능은 PLM 안에 축적된 데이터를 대상으로 한다. 규격·규제 문서, 설계 기준, 변경 이력 문서 등이 분석 대상이다. 사용자가 이 데이터에 대해 자연어(Natural Language) 질의를 던지면 된다. 그러면 시스템은 요약된 답변과 함께 관련 문서를 즉시 제시한다.


▲ 문서 인사이트 기능은 내년 2분기 상용화를 목표로 개발·고도화 중이다. (촬영·편집 : 헬로티 최재규 기자)
이러한 메커니즘은 개방형으로 설계된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를 전제로 한다. PTC는 인텔리전트 제품 라이프사이클을 각 조직이 따로 개발하는 전용 시스템이 아니라, 개방형 표준을 따르는 클라우드 기반 구독 서비스 형태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온프레미스(On-premise)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하되, 설계·ALM·PLM·서비스 영역에 PTC SaaS를 연동해 함께 쓰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단계적 이전(Migration) 접근법을 취한다.
사용자는 가장 필요한 기능과 데이터부터 순차적으로 새로운 시스템에 이전한다. 이로 인해 기존에 사용하던 레거시(Legacy) 시스템과 파트너 솔루션을 당장 폐기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다. 결국, 사용자는 부담 없이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단계적으로 인텔리전트 제품 라이프사이클 구조에 편입될 수 있다.
AI보다 먼저 손봐야 할 기반, ‘제품 데이터 파운데이션’
이봉기 PTC 코리아 사업 개발 총괄 마스터는 AI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데이터라고 언급했다. 그는 먼저 ‘제품 데이터 파운데이션(Product Data Foundation)’ 방법론을 내세웠다. 엔지니어링·제조·서비스 전 영역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신뢰 가능한 형태로 정비하지 않으면 어떤 AI도 제조 현장에서 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설명한 제품 데이터 파운데이션은 제품 관련 모든 정보를 한 구조 안에서 관리하는 개념이다. ▲시스템·기능 모델 ▲요구사항 ▲테스트·검증 결과 ▲소프트웨어 ▲전자·기구 설계 데이터 ▲시뮬레이션 결과 ▲‘각종 자재명세서(xBOM)’ 및 제품 구성 정보 ▲서비스 기록 등을 동일한 기준과 규칙에 맞춰 데이터화하는 것이다.
여기에 개방형 표준, 모델 기반 시스템 엔지니어링, 변경 관리 원칙을 적용한다. 또 역할·정책·인증 등으로 표현되는 거버넌스를 더해 데이터의 정합성과 추적성을 확보하자는 접근이다. 이 거버넌스 단은 시맨틱 모델(Semantic Model)을 통해 데이터의 의미를 확실하게 부여하고, 온톨로지(Ontology)로 모든 사용자가 데이터를 동일하게 해석하도록 돕는다.


▲ 인텔리전트 제품 라이프사이클 전략 설명 자료. (촬영·편집 : 헬로티 최재규 기자)
이봉기 마스터는 “엔지니어링 부문에서 신뢰성이 떨어지는 AI를 활용하면 곧장 치명적인 이슈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규제 준수, 안전, 보안을 고려하면 AI 모델보다 먼저 데이터 파운데이션과 거버넌스를 정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제품 데이터 파운데이션에 각 업무 영역에 맞는 임베디드 AI(Embedded AI)를 더하는 조합이 결국 기업 경쟁력을 가르는 요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때 임베디드 AI는 제품 데이터 파이프라인 자체에서 흐르는 데이터를 분석한다. 이후 설계·생산·서비스 등 특정 업무 단계 안에서 실시간으로 지능적 판단과 자동화된 조치를 수행하는 역할을 할 전망이다.
PTC는 데이터 파운데이션과 임베디드 AI 전략을 파트너 생태계와 함께 키우겠다는 방침이다. 글로벌 차원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아마존웹서비스(AWS)와 협력해 클라우드와 생성형 AI 인프라를 공급받는다. 엔비디아(NVIDIA)와는 디지털 팩토리와 실시간 3D 협업 및 시뮬레이션 플랫폼 ‘엔비디아 옴니버스(NVIDIA Omniverse)’ 기반 가상 환경을 크레오·윈칠과 연동한다. 이로써 설계·시뮬레이션을 고도화하는 구상을 밝혔다.
국내에서는 AI·클라우드 전문 디지털 엔지니어링 플랫폼 업체 에티버스(ETEVERS)와 손잡았다. 항공우주·방위·의료기기 등 산업군에서 엔지니어링 서비스를 공동 기획하는 것이 골자다.
로봇 생태계의 디지털 백본 노리는 PTC
로보틱스는 이날 주요 키워드는 아니었지만, PTC가 최근 급부상하는 피지컬 AI(Physical AI) 흐름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드러내는 분야다.
이봉기 마스터는 “자동차, 하이테크, 상업용 기계, 인더스트리얼, 의료기기 다섯 개 산업군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인더스트리얼 안에 로봇 산업이 포함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실제로 여러 글로벌 로봇 업체가 로봇 본체 설계, BOM 구성, 제조 지시서, 설치 이후 서비스 프로세스 설계 등에 PTC 솔루션을 활용하고 있다.
그는 “특히 대형 산업용 로봇처럼 물리적 위험이 큰 장비일수록 설치 이후 유지보수 이력과 부품 교체 기록까지 제품 생애주기 전체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PTC의 역할에 대해, 설계·PLM·ALM·서비스 솔루션으로 제품 데이터를 정리하는 영역을 맡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로봇 제조사가 각 데이터를 통합해 피지컬 AI 시대에 요구되는 지능형 로봇을 설계·운영하게 만드는 디지털 백본(Digital Backbone)을 제공하겠다는 포지셔닝으로 해석된다.
이 같은 구상은 앞선 파트너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엔비디아가 로봇 플랫폼과 피지컬 AI 생태계를 키우고, PTC가 그 뒤에서 제품 데이터와 라이프사이클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 구조로 풀이된다. 로봇의 ‘몸·두뇌’를 고도화하는 주체와 이를 떠받치는 제품 데이터 인프라를 잇는 연결점에 인텔리전트 제품 라이프사이클을 두겠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PTC가 이번에 제시한 인텔리전트 제품 라이프사이클 전략은 로봇·AI 인프라 경쟁이 ‘제품 데이터와 라이프사이클’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주요 사례로 분석된다.
헬로티 최재규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