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모먼트] ‘소버린 AI 전쟁 시작됐다’ 세계가 마주한 기술 주권의 시험대

2025.08.25 15:44:43

서재창 기자 eled@hellot.net


마치 전기가 한 나라의 산업과 생활을 지탱하는 필수 인프라가 된 것처럼, 이제 인공지능도 국가의 심장부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이 되고 있다. 하지만 전기를 외국에서 끌어다 쓰듯, AI를 해외 빅테크 기업의 모델에만 의존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행정·의료·교육 같은 민감한 영역에서 우리의 언어와 데이터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스템이 결정권을 쥔다면, 이는 단순한 기술 격차가 아니라 국가 주권의 문제로 이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버린 AI(Sovereign AI)’, 즉 각 나라가 자국 상황에 맞게 직접 개발하고 운영하는 AI의 필요성이 등장한다. 



소버린 AI가 불러온 파급효과


소버린 AI의 필요성은 무엇보다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 의료·법률·교육·국방과 같은 핵심 영역에서 글로벌 빅테크가 제공하는 AI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면, 이는 정책적 자율성과 데이터 주권을 잃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다국적 기업이 만든 모델은 해당 국가의 언어적 뉘앙스나 법제·문화적 맥락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반대 측면도 존재한다. 국가별로 AI 모델을 쪼개어 개발하면 글로벌 상호운용성이 저하되고, AI 발전 속도가 늦춰질 수 있다. 데이터 사일로는 혁신을 막는 족쇄가 될 수 있으며, 특히 AI 검열이나 정치적 편향 가능성은 심각한 우려로 제기된다. 

 

독자 AI 모델 프로젝트 시작한 우리나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최근 네이버클라우드, 업스테이지, SK텔레콤, NC AI, LG AI연구원 총 다섯 곳을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 지원 대상으로 선정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한국어와 산업 데이터를 반영한 독자 모델을 개발해 글로벌 빅테크 의존도를 줄이고 국가적 AI 역량을 확보하겠다는 취지다.

 

정부는 6개월마다 단계 평가를 거쳐 최종적으로 한두 곳을 선정해 집중 지원할 방침이다. 이번 프로젝트의 최대 과제는 데이터와 GPU다. AI 모델 품질을 결정하는 데이터는 흔히 ‘AI 시대의 석유’라 불린다. 하지만 한국은 미국과 중국에 비해 양질의 학습용 데이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정부는 국가기록원, 국사편찬위원회, 통계청, 특허청 등 공공기관 데이터를 공동 구매해 제공하고, 각 컨소시엄의 특성에 맞는 개별 데이터 구축도 지원할 방침이다. 문제는 시간과 예산이다. 데이터 구매 예산이 100억 원에 그치고, 첫 평가 시점인 12월까지 데이터 제공처도 확정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데이터 전처리와 GPU 아키텍처 최적화만 해도 수개월이 걸린다며 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클라우드 서비스 경험이 있는 대기업 중심 컨소시엄과 그렇지 않은 팀 간 형평성 문제도 잠재적 변수다. 

 

세계 주요국의 소버린 AI 전략은?

 

글로벌 패권 경쟁은 이미 치열하다. 미국은 현재 오픈AI, 구글, 앤트로픽 등 민간 빅테크 주도로 초거대 AI 모델을 발전시키고 있다. 동시에 국방부는 자체 AI 도입 전략을 강화하며, 주요 기업과 대규모 계약을 맺어 국방 분야에서 특화한 AI 도입을 추진 중이다. 중국에서는 바이두의 ERNIE 시리즈와 알리바바의 Qwen, 텐센트의 혼위안 등 주요 AI 모델이 국가 중심의 생태계에서 발전하고 있다. 특히 바이두는 ERNIE를 오픈소스로 공개하며 글로벌 접근성을 강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유럽연합(EU)은 규제를 강화한 소버린 AI를 내세운다. GDPR로 강력한 데이터 보호 체계를 마련한 데 이어, AI Act는 투명성과 안전성, 책임성을 강화한 세계 최초의 포괄적 AI 법안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규제 틀은 유럽형 AI 생태계를 뒷받침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특히 독일의 경우 OpenGPT-X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유럽의 디지털 주권 확보에 나섰다. 프랑스는 OpenGPT-X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자국 내 스타트업과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독자 모델 개발을 지원하며, 유럽 차원에서 디지털 주권 확보를 위한 공조 움직임에는 동참하고 있다.

 

중동 국가들은 석유 이후 시대를 대비해 AI를 차세대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특히 아랍에미리트(UAE)는 초거대 언어모델 ‘팰컨(Falcon)’을 공개하며 주목받았다. 이 모델은 아랍권 언어와 문화적 맥락을 깊이 학습해 글로벌 오픈소스 AI 평가 지표에서도 높은 성능을 기록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대규모 투자로 AI 인프라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국영 AI 기업 ‘휴메인(Humain)’은 엔비디아, AMD, 퀄컴, AWS 등과 협력해 수만 개의 GPU와 데이터센터를 확보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처럼 각국은 저마다 다른 경로로 소버린 AI를 추진하지만, 공통점은 데이터·인프라·전략 산업 보호를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한다는 것이다.

 

소버린 AI, 글로벌 산업질서 재편하나

 

소버린 AI는 글로벌 경제 질서에 직격탄을 날린다. 데이터 민감도가 높은 산업에서 자국형 AI 모델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언어적 특수성이 강한 국가일수록 소버린 AI의 가치는 커진다. 비영어권 언어는 글로벌 모델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했기에, 독자 모델의 산업적 활용도는 높아진다.

 

이와 함께 AI 학습과 운영에 필수적인 GPU·반도체·데이터센터 시장은 소버린 AI 붐과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엔비디아는 이미 소버린 AI 전용 플랫폼을 제시하며 국가 단위 고객 확보에 나섰고, 인텔·AMD·TSMC도 같은 시장을 겨냥 중이다.

 

글로벌 전문가들은 소버린 AI를 ‘신(新) 디지털 질서의 분수령’으로 평가한다. 각국이 독자 모델을 구축하면서 미국 중심의 AI 패권이 다극 체제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동시에 지나친 파편화가 혁신 속도를 저해하고, 국가 간 AI 협력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특히 우리나라는 반도체와 AI 연구 역량을 바탕으로 글로벌 질서 속 패권을 쥘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

 

이를 위해서는 모델 개발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데이터 개방, 인프라 확충, 법제 정비, 글로벌 협력 전략까지 총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반도체 생산국임에도 불구하고 AI 활용에서는 종속국으로 남을 가능성도 있다.

 

소버린 AI는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다. 앞으로 AI가 소수 빅테크에 집중될지, 각국의 독자 모델이 공존하는 다극 체제로 재편될지가 글로벌 질서를 가를 핵심 변수다. 우리나라 역시 단순히 모델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뒷받침할 데이터·인프라·규제·국제 협력을 종합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소버린 AI는 결국 국가 주권을 넘어 산업 경쟁력과 글로벌 위치까지 좌우하는 필연적 과제다.

 

헬로티 서재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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